[교회개척 이야기 2]
유영업 목사
신대원 기숙사는 뜨거웠다. 3평 남짓 되는 기숙사의 방은 어느 달동네의 쪽방 같은 느낌이었다. 웬만한 곳에는 다 있는 에어콘이 기숙사에는 없다. 선풍기 하나 소란스럽게 돌아갈 뿐이었다. 밤이면 더워서 잠을 이루기 어려웠고 그야말로 선풍기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기숙사에 몇 개 안되는 샤워장이 딸린 방을 쓸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게 또 문제였다. 주말에 몇몇 교회를 방문해본다고 방을 비웠는데 곳곳에 곰팡이가 피었다. 양복 위에 회색빛 곰팡이가 뒤덮여 있었다. 샤워장에서 나오는 습기가 문제였다. 알고 보니 양복에만 핀 것이 아니라 구석구석에 곰팡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내 눈에는 안 보이는 곰팡이가 아내 눈에는 잘 보였다. 아내가 방문하여 깜짝 놀라며 곰팡이를 일일이 닦아 주었고 그 소식을 들은 후배가 제습제를 보내주었다. 내 머리는 그 방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로 그렇게 채워져갔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일들은 이제 나와 무관한 듯 느껴졌다.
방은 기숙사 2층 남쪽 끝에 있었다. 그래도 볕이 잘 들지 않았다. 기숙사 바로 옆에 일차선 길이 있고 그 너머에 동산이 바싹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책상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면 나무가 보여 좋았다. 창문에 바싹 다가가면 하늘도 보였다.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도 들렸다. 서늘한 기운이라도 느껴보려고 창문을 열어놓았지만 신통치 않았다. 낮은 침대를 잠자리로 정했다. 이층 침대 윗 칸에는 그릇이나 비품들을 놓고 아래 칸에는 가방과 책과 서류들을 놓았다. 문제는 식사였는데, 학교 식당을 운영하지 않으니까 혼자서 해결하든지 바깥으로 나가 먹어야만 했다. 매번 나가서 먹는 일이 쉽지 않아 햇반과 반찬을 사왔다. 그런데 우유나 반찬이 금방 상해버렸다. 그래서 작은 냉장고 하나를 샀는데 날아갈 듯이 기뻤다. 생각이 참 단순해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내 생각은 이제 3평짜리 방에 머물러 있었고 내 영혼은 그 안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매일 걸었다. 신대원은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건물이 놓여있다. 남쪽 끝에 기숙사와 식당이 있고, 그 다음에 도서관, 행정동, 강당이 있다. 도서관과 행정동 동편에 강의동이 있다. 처음에는 기숙사에서 강당까지 왔다 갔다 하였다. 좀 더 반경을 넓혔다. 최대한 길게 걸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기숙사에서 시작해서 강당까지, 강당에서 주차장으로해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되었다. 학교 서쪽 끝에 있는 정문을 지나 길 끝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올라와 교수사택을 지나 기숙사로 돌아오면 학교의 끝선을 따라 한 바퀴 돌 수 있었다. 그렇게 돌면 약 1킬로미터가 되었다. 걸음수로는 1800정도 되었다. 만보를 걷는게 목표니까 여섯 바퀴를 돌았다. 처음에는 3바퀴 도는 일도 힘들었다. 나중에는 거뜬히 여섯바퀴를 돌 수 있었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시간을 가리지 않고 돌았다. 걸으면서 기도했다. 찬양을 들었다. 말씀도 들었다. 그렇게 걷다보니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짐을 느꼈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던 것들이 조금씩 지워지는 것을 느꼈다.
순복하기 위해서는 숨죽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시간의 길이는 다르겠지만 없어서는 안되는 시간이다. 자기 생각을 포기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을 추스르는 일이 잘 안되기 때문이다.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는 일은 정말 어렵기 때문이다. 순복해야지 하며 억지로 찍어 누르면 다시 튀어 오른다. 그렇게 망가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돌아보면 기숙사에서 보낸 4개월은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다. 삼위하나님을 묵상하며 나를 죽이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렇게 숨죽이는 시간이 없었다면 교회개척이라는 명령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전히 두려워했을 것이다. 기숙사의 작고 뜨거웠던 방, 곰팡이와의 전쟁, 작은 냉장고의 행복, 혼밥의 시간, 걸으며 묵상하기 등은 생각의 패턴을 바꾸는 시간이었다. 다 버리는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숨죽이는 시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아내는 얼마짜리 집을 얻어야 우리가 살 수 있는지 여러 곳을 다녀보았다고 했었다. 높은 집값에 절망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삶의 다른 계획은 전혀 하지 못한 채, 그냥 숨죽이며 보냈다. 지금 돌아보면 교회개척이라는 쉽지 않은 명령에 순복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었다. 숨죽이는 시간이었다.
교회개척 이야기 2 - 순복하기 위해 숨죽이는 시간 - 고신뉴스 K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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